목포 여기어때

바람과 바다의 노래, 목포

1895년에 목포는 전남 무안군에서 갓 독립한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이후 한때는 전국 6대 도시 중 한 곳으로 커나갔던 목포. 일제가 들어오면서 목포의 정신과 태생적 근거는 조금씩 변했지만 그래도 목포는 남도를 대표하는 자존심이었다. 굵고 짙은 바닷바람과 진한 비린내가 풍길 것 같은 항구 도시. 목포에 도착하면 우선 많은 냄새가 도시에 낮게 드리워져 있다. 오랜 동안 이곳의 주요 생업수단이었던 뱃사람들의 생명력, 목포 시내에 서린 과거 일제의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 목포에서 자생해 목포를 지탱해왔던 목포의 문화와 예술. 목포는 그 자체로 목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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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고 짙은 바닷바람과 진한 비린내가

풍길 것 같은 항구 도시.

목포에 도착하면 우선 많은 냄새가 도시에 낮게 드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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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

목포가 목포다울 수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목포항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의 삶, 항구의 애환 그리고 목포의 애달픔은 모두 목포항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또 이어질 수 있었다. 목포항은 1897년 10월에 공식적으로 개항된 100주년이 넘는 역사 깊은 항만이다. 이곳을 통해 목포가 발전했고 그래서 이곳을 통해 목포가 변해왔다. 목포항에 서면 유난히 바다의 비린내가 강하다. 바람의 세기도 무섭도록 치열하게 다가선다. 그것이 너무나 좋다. 짜고, 시고, 달고, 쓴 목포의 냄새가 구석구석 배어있다. 목포의 입구이자 머리. 가장 목포다운 곳. 근처에 제주로 떠나는 목포항국제여객터미널이 있다.


항동시장 거리

목포와 아날로그의 만남. 흔한 표현이지만 이곳 주변의 정취는 이렇게 설명된다. 목포의 문화와 예술을 만 나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가는 길은 여지없이 이곳과 연결되고 항동시장은 어김없이 한 자리에 남아 목포의 삶을, 또 항구의 인생을 지탱하고 있다. 과거 목포에는 목포자유시장을 비롯해 일곱 곳의 시장이 있었지만 거의 시가지 개발 때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항동시장과 주변 거리는 많은 것들이 세월을 따라 자취를 감춘 이후에도 대부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채 켜켜이 쌓인 시간과 함께 머물러 있다.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전에 문이 닫혀 빛이 바랜 상점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때론 문을 걸어 잠근 형태로, 또 때론 세월의 농도를 낮춘 채 당시의 모습 그대로. 한약방과 양복점 그리고 오래된 만화가게와 전파사의 흔적들. 유리창이 깨져 있어도, 거미줄이 걸려있어도 오히려 묘한 정취가 스며드는 곳. 근대와 현대의 중간 즈음에서 스스로 머물러 있는 항동시장. 이곳의 거리는 오히려 목포의 삶과 가장 오래 이어져온 곳일 것이다


목포문화원

항동시장에서 목포역 방면으로 가다 보면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로 사용됐던 목포문화원이 보인다. 이 건물은 1929년에 건립되었지만 당시의 호남은행은 일본 자본 에 대항한 호남 지역 인사들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근대문화역사관

유달산으로 오르기 전, 언덕 넘어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를 앞에 두고 주황색으로 반짝이는 건물이 있다. 근대문화역사거리의 중심, 근대문화역 사관이다. 목포근대문화역사관은 목포 개항 이후 일본의 영사 업무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목포부청사의 역할을 하다 해방 후 목포시청, 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등으로 얼굴을 바꾸어 왔다. 아마도 이렇게 부침이 심했던 역사의 이면에는 외관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1층의 근대도시 건축 특별전에는 개항 이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갔던 당시의 목포 시가지를 목제 미니어처로 집대성해 놓은 전시품이 있으며, 부드럽게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목포의 태동부터 시대별로 목포의 역사 자료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 두었다. 호남 최초의 성당인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사용했던 라틴어로 쓰인 미사경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목화의 솜과 씨를 분리하는 데 필요한 일본산 조면기 또한 이색 볼거리이다. 무엇보다 역사관 정문을 통해 보이는 멀리 목포항과 주변의 모습이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아름답다


근대문화역사관 별관


일제가 한국 경제를 독점하기 위해 세운 특수 국책회 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목포지점 건물로 일제 강점 기의 실증적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1층에는 시대를 관통한 목포의 근현대사 사진이 전시되고 있으며, 2층은 일제의 행각을 증언하는 다수의 사진작품으로 구성 되어 있다. 내부 사진촬영은 엄금.



경동성당


따뜻한 색감의 회색빛 벽돌로 지어진, 한국교회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가톨릭교회의 평신도 신앙 공동체를 도입한 목포 경동성당. 목포여중과 길 하나로 이웃하고 있다. 좌우대칭의 균형감 있는 석조 건축물은 성당 건물 이전에 우수한 건축적 가치를 지닌다. 1950년대 초반에 지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66년 개축된 모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성당 외부에는 김대건 신부상이 있으며 내부로 들어가면 103위 한국 성인의 커다란 성화가 신자와 순례자를 안내한다. 2층을 통해 본당으로 들어서면 유럽의 화려한 성당이나 교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전해져 오지만 종교시설에 대한 개개인의 평가는 원래, 겉모습으로 가늠하지 않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성당 외부에서 보았던 정교미와 대칭구조 역시 뚜렷하게 나타나는 터라 성당 내부에서도 왠지 모를 집중도가 높아진다. 엄숙함은 기본, 그리고 경건함은 당연한 자세.


동본원사


목포 최초의 일본 사찰로 교토에 위치한 동본원사의 별원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으며 한눈에 보아도 일본식 건물이라 눈에 쉽게 띈다. 뜻밖에 이 사찰 건물은 2007년까지 교회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오거리 문화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활용되고 있다. 검은색의 지붕은 경사가 급해 한국식 사찰의 지붕 형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경사는 무려 75도. 1898년 최초로 지어졌으며 1930년대에 새롭게 개축됐다. 일본 내 본원사라는 종파는 무수한 살생을 저지르는 무사들도 보호, 구원해 주는 종파로 주로 사무라이가 따랐던 종파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정신을 절대 따를 필요는 없지만 역사는 그대로 두어 두고두고 곱씹을 것. 이 중요한 화두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주문이며, 그 상징이 동본원사이다.



유달산


노령산맥의 가장 마지막 봉우리.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붙 여진 이름 유달(鍮達). 유달산이 목포사람들에게 지니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유달산은 목포항과 더불어 목포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자 정신이요, 또 어머니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 다. 목포는 유달산을 중심으로 자라왔고 또 그 산을 배경으로 커왔다. 목포사람들이 외지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유달이라는 넉넉하되 강직한 산이 그들을 받쳐주고 보듬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달산은 분명 목포사람들에게 산 이상의 ‘산’ 역할을 한다.


유달산은 차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지만 근대 문화거리 쪽을 통해서 도보로 오를 경우 골목골목을 통하므로 의외로 한적하고 조용한 정경을 만날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노적봉 예술회관. 2009년 개관한 목포의 대표적 공립미술관으로 1층은 갤러리, 2층은 전시관이며 3층은 야외공연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장료는 무료. 3층으로 올라가 목포의 전경을 바라보면 그간 계단을 오르며 흘렸던 땀은 이곳에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목포의 공기와 목포의 바람은, 어느 곳 그 어디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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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은 목포항과 더불어

목포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자 정신이요

또 어머니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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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적봉 야외무대에서 목포의 전경을 보고나면 이제 노적봉을 만날 시간. 노적봉은 유달산 중간 지점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봉우리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 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활용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당시 이순신은 짚과 섶을 엮어 바위를 둘렀고 이 장면이 멀리서 봤을 때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보여 적이 퇴각했다는 이야기. 유달산의 대학루로 오르기 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호령하듯 서 있다. 유달산을 대표하는 다섯 누각 대학루, 유선각, 달선각, 곽운각, 소요정 중 가장 아래에 위치한 대학루(待鶴樓). 이 정갈한 누각에서 다도해와 목포 시내 전경이 가득 담긴다. 멀지 않은 곳에 목포항과 목포역이 보이고 이제는 매입이 되 어 서로 이어진 삼학도도 들어온다. 바다 건너 대불공단과 무엇보다 목포 앞바다가 담겨, 심 지어 마음마저 설레는 곳. 목포에 온 이상, 목포의 바다와 함께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이 유달산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 목포와 끝까지 같이 남을 곳, 유달. 목포는 유달에 안겼기에 그리고 유달은 목포를 품었기에 목포는 비로소 완성이다. 




목포 해양유물 전시관


목포 문화 예술의 최종 집약지인 갓바위 문화타운에 자리한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겸하고 있으며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국립 기관으로 1994년에 문을 열었다. 다양한 연구 활동뿐만 아니라 새로운 해양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여 목포가 바다의 도시이자 동시에 그 바다와 잘 소통하고 있음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상설전시실은 1층 고려선실과 신안선실, 2층 세계와 한국의 배 역사실 등 총 4실이며, 지하와 야외 전시장에서도 다양한 전시회와 교육 및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관람객들이 해양문화유산을 보다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무료 전시해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가보물로 지정된 고려청자 3점도 보관, 전시 중이다.



갓바위

해양유물전시관에서 옆길을 따라 가면 만날 수 있는 갓바위. 평화광장의 산책로를 따라서도 갈 수 있다. 바닷가 쪽으로 나무로 된 데크길이 나 있어 목포 시민들이 유달리 좋아하는 바다 산책길. 수많은 시간 동안 해풍과 비바람에 깎인 2개의 갓바위는 각각 8미터와 6미터 정도로 바위가 마치 스님 두 분이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갓바위라고 불린다.


목포자연사박물관


국내 최대 규모의 자연사박물관으로 갓바위 문화타운 내에서 가장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공간이다. 세계에서 단 2점만이 존재하는 포레노케탑토스 공룡화석과 각종 다양한 관련 자료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으며 수중생명관과 육상생명관 또한 희귀한 곤충과 바다 속 생물들을 다양한 형태로 전시하고 있어 학습효과가 크다. 목포생활도자 박물관과 목포문예역사관이 연계되어 운영되므로 티켓은 항상 소지해야 한다.



목포생활도자박물관


2006년에 개관해 서남권 도자문화를 알리고자 세워진, 목포생활도자박물관. 박물관의 네이밍에서 이미 생활 속 공예문화를 주창한다. 도자에 관해서는 호남 최대의 복합 문화공간인 목포생활도자박물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을 통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자문화를 선보이고 있으며 세라믹 체험과 물레 체험 등 도자기와 관련된 프로그램으로 생활 속 공예문화를 일반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목포문예역사관


남종산수화의 거장인 남농 허건(許楗)이 직접 기증한 수석과 독창적인 그의 그림들이 전 시되어 있으며 한국 구상미술계의 거목 오승우 화백의 서양화도 콜렉션 되어 있다. 목포의 예술 문화를 재조명하는 작지만 알찬 공간. 내부는 대부분의 공간이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다. 역시 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목포문학관


입암산 야트막한 아랫턱에 위치한 목포문학관. 이곳에서는 목포가 길러낸, 목포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가 4인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층엔 한국 최고의 극작가이자 사실주의 연극의 완성자로 불리는 차범석과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인 박 화성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엔 한국 문학의 최고 평론가인 김현과 한국 근대 문예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 작가인 김우진의 관련 자료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차범석은 ‘연극인은 관객의 정신에 불을 지르는 방화범이어야 한다’며 항상 연극적인 정신을 주창해 온 지독한 연극인이었으며 김현은 특유의 문체로 한국 문학평론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연 바 있다.

문학 평론가 정과리는 김현을 일러 가히 ‘김현적 풍경’이라는 표현을 빌려 그의 필력을 추앙한 바 있다. 윤심덕과 동반 투신한 그 유명한 현해탄 로맨스의 주인공 김우진과 근대 문학사의 어머니로 불리며 이광수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박화성 또한 목포를 대표할 수 있는 예술적 거목들이었다. 목포를 항구의 도시가 아닌 예향의 도시로 부를 수 있는 네 개의 커다란 별. 그들이 남겨놓은 별 자리, 바로 목포문학관이다.



남농기념관


문예역사관에서 남농에 대해 아쉬움이 남았다면 마침 바로 근처에 위치한 남농기념관이 있어 그의 작품 세계를 더 찾아볼 수 있다. 남농기념관은 1985년 남농 허건이 남종화의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세웠다. 허건은 진도 출생이지만 일찌감치 목포로 건너와 이곳에서 그의 예술혼을 꽃 피운 바 있다. 남농은 목포에 정착한 이래 목 포를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작고했다. 운림산방의 3대 화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와 미산(米山) 허영(許瑩) 그리고 남농의 작품들을 위주로 300여 점이 1층과 2층에 전시되어 있다. 갓바위 문화타운 내 일본인 등 외국인의 방문이 가장 많은 곳.